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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간이역으로 가던 새벽길을 회상함

통통마녀 2013. 2. 11. 12:48

내게 설과 추석이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떠올리게 하는 간이역에 대한 추억이다.
설이 무엇인지, 추석이 언제인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 어머니는 새벽녘 곤히 자는 어린 삼남매를 깨웠다.
이제 겨우 일곱 여덟살이었을까?
영문도 모른채 억지로 일어난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부모님 손에 이끌려 아무도 없는 새벽길을 나서야 했다.

거짓말처럼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차가운 새벽공기를 마시며, 어두운 새벽길을 우리 가족만 침묵하며 걸었다.
인적없는 어두운 거리는 무서웠다.

가로등조차 변변하지 않던 시절이라 길은 어찌나 어두웠던지

부모님 발자국을 놓치는 순간
그대로 길을 잃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말 한 마디 못하고 무작정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는 두려움에 말문마저 닫혀버렸던 것이다.
길은 멀었다.
날은 추웠고, 다리가 아팠다.
그렇지만 부모님을 놓쳐서는 안되었기에 있는 힘껏 부모님을 따라 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내가 침묵 속에 어두운 새벽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공포때문이었다.
어린시절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공포, 부모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너무 두려워
나는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고 무작정 걷기만 했던 것이다.

그 시절은 그랬다.
말썽을 피우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사고를 치면, 부모님으로부터 "갖다 버린다"는 말을 무시로 들어야 했다.
나의 부모님이 무지몽매한 일자무식꾼도 아니었건만,
내 부모님도 그리 말씀하겼고, 고만고만한 내 또래 자식을 둔 동네 아줌마와 아저씨 모두 습관처럼 그 말을 내뱉았다.
"갖다 버리겠다"는 경고는 그 시절 부모님들이 공유했던 자식 겁박법이었건거다.

친구들과 놀 때는 별 생각없이 흘려보냈던 그 말이 어둠속에서 살아났다.
어둡고 인적 끊긴 골목에서 되살아난 그 말은 어린 나를 두려움에 떨게했다.
말썽만 피우는 세 남매를 아무도 안보는 곳에 버리러 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됐다.
입을 열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은 얼어붙었는지 소리는 커녕 숨조차 젲대로 쉴 수 없었다.

그 새벽, 어린 내가 걸었던 길은 참으로 길고 멀었다.
길이 언제 끝나는지, 도대체 끝나기는 하는 것인지,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채
가뿐 숨만 내쉬며 무작정 걸었다.
네게 설과 추석은 새벽 찬 공기와 텅 빈 거리를 울리던 발소리로 남아있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싸워가며 도착한 곳은 기차역이었다.
부모님은 명절을 쇠러 나선 것이었다.
지은지 오래된 일본식 목조건물로 된 대합실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나는 안심했다.
톱밥 난로조차 지피지 않아 썰렁한 대합실, 거기에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론가 사라진줄 알았던 남자와 여자, 또래 아이들이 두런두런 모여 있었다.
무표정하게 새벽 추위를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으로 길고 무거웠던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합실 문지방을 넘는 순간, 버림받는 것이 아니었다는 안도감에 비로소 온전하게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조그만 간이역 대합실은 어린 내가 도달한 평화의 땅이었다.

명절만 되면 일곱살 혹은 여덟살 무렵 어린 내가 걸었던 그 길이 생각난다.
그 길은 무서웠고, 길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처럼 아득하게 멀었다.
그 길의 끝에 지금 마흔여덟, 내가 서있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일곱살의 나를 만난다면,
어린 계집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마 입술은 앙다물고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할 것이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두 눈만 반짝거릴지도 모르겠다.

40년의 강을 건너 서있는 나는 어떤 표정일 것인가?
어린 내가 늙은 나를 보면 어떤 말을 할까?

아줌마!
어디 아파요?
힘들어보여요!
기운내요!

일곱살 내가 마흔여덟살 나를 토닥인다.
작고 여윈 계집아이는 쑥스러운듯 이내 등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설날 아침, 늙은 시아버지가 건네주는 세뱃돈을 받으며
가슴 졸이며 걸었던 유년의 설날 새벽을 떠올린다.

어린 계집아이는 벌써 사라졌다.
잔뜩 몸을 웅크린채 새벽길을 걷던 여자아이가 걸었던 그 길에 서있다.

참 많은 시간과 길들을 지나왔음을 깨닫는다.
사십년의 강을 건너 나는 나를 만날 수 있을까?